라캉의 응시의 시학1 응시/낭만주의/대상a/시니피앙/눈과응시의 삼각형/표상주체/상징계/실재계/메두사신드롬/시관충동/거세불안/환상/수도승/생톰/환상 가로지르기/호접몽/나르스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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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Sep 5, 2023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올리네요. 본영상은 전시간에 이어 시학은 라캉의 응시 개념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간입니다. 먼저 라캉의 응시의 시학은 1, 편으로 나뉘어져있고요, 이번편은 1편입니다. 먼저 라캉의 눈과 응시의 삼각형의 얼개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미지와 스크린의 의미를 파르세우스의 신화, 즉 페르세우스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얼굴을 실재를 직접적으로 보지 못하고 환상이나 꿈으로밖에 볼 수 없는 표상주체의 입장을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장자의 호접몽을 라캉의 환상, 매혹, 환상 가로지르기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 환상공식을 설명했습니다. 응시의 특성으로 주체의 해체 desubjectivation, 메두사신드롬, 시관충동, 아름다움에의 매혹됨에 대해 설명합니다. 응시 Le regard, 대상a, 광원점이 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표상주체, 눈, 실측점이 같은 자리에 위치하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환상가로지르기의 일환으로 sinthome과 보로메오 매듭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그리고 노자의 도, 기도교의 성령, 쇼팬하우어의 순수인식주관, 불교의 진아와 공적영지, 하이데거으 본래적 현존재, 중용의 지성, 모리스불량쇼의 중성이 환상 가로지르기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라캉이 제시한 응시의 삼각형 도식을 먼저 볼께요.
라캉은 세미나 11에서 눈과 응시(시선)의 삼각형을 제시했는데요 여기서 존재와 의미, 주체와 타자, 충동과 욕망의 분열은 인간의 시관적 장에서 눈과 응시의 분열로 반복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라캉의 주장을 근거로 저는 이 응시 혹은 시선(le regard)이 일종의 대상 a와의 대면이라고 봤습니다.
그림 동그라미친 1번을 먼저 봐주십시오. 이것은 오른쪽에 표상주체가 자신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이며 다만 그 가운데 이미지 장막이 놓여있습니다. 주체는 대상의 그림자인 이미지만을 볼 뿐입니다. 특히 주체는 거대한 대타자의 장에 묶여있어서, 즉 타자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대상의 실체를 전혀 알 수도 없고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점을 눈으로 실측하는 점이라해서 실측점이라고 명명합니다. 주체가 대상을 응시하다라는 동사regarder를 써놓았습니다. 그 위에 그림 6번은 1번 삼각형을 꼭지점을 위로 하도록 세워서 위에서 본 모양입니다. 맨 외곽에 대문자A는 대타자를 말하고요, 중간에 I는 이미지장막을 말합니다. 가운데는 대상a입니다. 다음 2번을 봐주시죠. 왼쪽 꼭지점이 광원점, 대상a, 명사인 le regard입니다. 빛이 나오는 이 시선의 점이 상징계표면에 난 구멍이기도 하고, 실재인 대상a가 위치해있는 자리입니다. 가운데 스크린이 있는데 이는 우리 눈이 실재를 볼 수 없으며 설령 아주 예외적으로 본다면 정신병에 빠질위험이 있으므로 하나의 보호막 역할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이 스크린이 왜 보호막인지는 페르세우스-안드로메다 신화를 보면 쉬워집니다. 페르세우스가 아폴론이 준 방패를 가지고 Medusa를 죽이러 갈 때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대면하면 안되겠죠. 왜냐하면 메두사의 얼굴을 본 자는 반드시 돌로 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직접대면하지 않고 방패에 비친 그를 보고 메두사가 잠잘 때 칼로 내려쳤죠.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이 스크린은 마치 페르세우스의 방패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picture그림은 대상a가 빛을 비춰 주체의 망막에 그림으로 맺히게 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주체의 그림자는 망막에 맺히지만 정작 주체 자체는 사라집니다. 4번 그림은 2번그림을 세워서 위에서 본모양입니다. 가장 바깥에 현실이 존재하고 가운데는 보호막인 스크린입니다. 3번과 5번은 응시의 효과가 완성된 모습을 도식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1번 도식은 상징계, 즉 대타자에 예속된 주체의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므로 의식적차원이지만, 2번 도식 즉 바같에서 응시라는 광원점이 나를 비추는 이 과정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응시라는 광원이 왜 생긴 것인가의 문제가 조금 남죠? 그것은 이제 설명중에 드러날 겁니다.
라캉에 의하면 눈은 의식적인 장에서 실측적인 시관the geometrical vision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반면에 응시는 무의식적이며 비스듬한 시각으로 대상을 보는 방식을 취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라캉은 대사들에서도 정면 아래쪽에 있던 얼룩이 정면에서는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림이 있던 방을 떠나면서 뒤를 돌아볼 때 비로소 그것이 해골이미지임을 알수 있다고 했습니다.
라캉은 눈과 응시 사이에는 어떤 일치점(동질성)도 없으며 다만 서로 간에 끌어당기는 힘, lure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실재와 주체와의 관계에 대해 라캉이 말한 것처럼, 눈과 응시사이에는 불일치만이 있을 뿐이며 what I look at is never what I wish to see.’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절대 내가 원래 보길 원했던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이게 무슨말입니까? 앞에 보고 있는 대상이 그 본모습이 원래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르게 보인다는 의미죠?
이처럼 응시는 근본적으로 결여된 우리의 시관능력이 끝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대상 a와 맥락을 같이한다. 즉 시선(응시)은 '거세 불안을 야기하는 결핍'(symbolic of ‘the lack that constitutes castration anxiety)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요즘 사람들이 핸디폰에 24시간 의존하는 모습은 뭔가 보지 않으면 불안에 사로잡히고 처음엔 자기가 보고싶은 것을 보고자 하는데 결국은 그렇지 않아서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을 반복할 뿐입니다.
대상a는 뭡니까? 자아가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떼어낸 것이잖아요.
우리는 부분대상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어머니대타자 전체를 되찾는다고 생각합니다. 대상a도 부분대상의 일종이고, 또 우리 눈이라는 기관이 사물자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므로 응시가 하나의 부분대상으로서 눈의 불완전성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기관의 하나인 눈은 항상 타자가 덧씌운 이미지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무의식적인 시선(응시)가 출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선(regard)이 곧 대상a 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되셨죠. 대상a는 완전히 사라져서 되돌아올 수 없는, 원초적으로 잃어버린 대상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라캉은 이를 어떤 표상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fantasized gaze환상화된 응시라고 명명했습니다. 사실 라캉이전에는 이 환상화된 응시로서의 시선은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로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항상 신이 시선뒤에 숨어있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이 시선은 주체로 하여금 대상에게로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체라는 지위를 갖기위해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대타자에게 양도했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대상a인 것처럼, 이 응시도 시관이라는 측면에서의 일종의 대상a입니다.
이 시선은 시각적 환상의 원인입니다. 전혀 결핍이 없는 이 시선은 눈을 매혹해서 두려운 생경함uncanniness을 일으킵니다. 이는 꿈꾸는 주체나 환상에 빠진 주체의 통제력을 중지시킵니다. 주체는 시선이 자기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모르며 그냥 따라가기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비 꿈을 꾸면 그 사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냥 나비가 됩니다. 이 시선에 압도된 사람은 주체-대상의 구별이 없어집니다. 그림의 관람자는 이러한 응시의 영향력하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림의 효과는 바로 매혹(사로잡음)입니다. 즉 주체의 눈은 이미지에 붙잡혀 있어서 이미지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응시의 영향권에서는 그는 하나의 얼룩이 됩니다. 즉 시선에 의해 사진 써지는 것이죠. 대사들에서 응시의 영향하에 있는 주체는, 시각의 장에 포획되고, 조정되고, 매혹에 빠집니다. 그래서 라캉은 시선의 영향하에서는 '나는 (시선에 의해) 사진에 찍힌다“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 얼룩을 보는자가 오히려 얼룩에 의해 사진써지고 하나의 tableau, 그림으로 전락한다고 보는 것이죠.
호접몽 제2연에서 ‘깨어남’은 깨어났다고 생각되는 ‘주체’라는 실상이 사실은 한갓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꿈속에서는 확연하게 나비, 혹은 장주였지만 꿈을 깨고 나니 장주였는지, 나비였는지 모호해져버린 것이다.
장자가 꿈에서 자신이 나비가 되어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행복한 꿈을 꿨는데 깨어나서 생각해보니 자기가 꿈을 꾼 주체인지 아니면 자신이 실제로 나비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말하는주체가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주체는 다름아닌 꿈을 얘기하는 장주입니다. 자신이 꿈을 얘기하는 것 자체도 꿈이라는 것입니다. 즉 환상은 언어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장자는 이런말도 했는데요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外物」)“말의 의미는 뜻을 얻는 것에 있으므로 뜻을 얻게 되면 말을 잊어야 한다” 바로 이게 모리스블량쇼가 말하는 글쓰기를 통해 언어를 뿜어낸 작가의 상징적 죽음, 그리고 라캉이 말하는 언어로 사물을 호명하면 사물은 살해되는 것이라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맥락임을 알수 있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인식은 이미 대타자의 권력이 작용한 것이므로 사물(物)에 대한 우리의 언어는 모두 인간 인식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한계를 지닙니다. 또 하나의 예는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로되 물은 물이도다”의 말씀도 첫번째 산은 하나의 기표에 지나지 않는 산이고 두 번째 산은 신경증 주체가 볼 수 없는 실재, 혹은 대상a의 산입니다. 마찬가지로 첫 번째 물은 가시적인 물이며 두 번째 물은 대상a의 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꿈을 말로 얘기하는 말하는 주체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꿈을 말하는 사람은 장주겠죠. 그런데 장주조차도 말하는주체가 되면, 그는 상징계의 주체인 것입니다. 상징계의 주체는 분열된 주체로서 꿈에서 본 실재를 언어로 다 구현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장자의 나비의 꿈에서 라캉식 해석은 인간은 언어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꿈과 현실을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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