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2편/키치/안나카레리나/라깡/기호계/줄리아크리스테바/상징계/스탈린/야코프/아브젝시옹/밀란쿤데라/전체주의/형이상학적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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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Jan 3, 2024

전시간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1부5부의 가벼움과 무거움, 2부4부의 영혼과 육체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1편에서 사비나가 토마시와 정사를 가질때마다 중산모를 쓰는 것과 테레자가 토마시의 아파트를 처음 찾았을 때 안나카레니나라는 소설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남녀 간 사랑과 정사에 있어서도 사회적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사이에서 방황하는 토마시, 그리고 영혼과 육체의 화해가능성을 두고 고뇌하는 테레자, 사비나와 테레자 사이의 긴장관계와 연민, 그리고 우연의 새들에서 필연과 주술적인 힘을 만들어내는 테레자, 반면에 똑은 우연의 새들에서 무거움을 느끼는 토마시의 심리상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3부, 6부, 7부에 대해 하겠습니다. 3부는 사비나와 프란츠의 결코 만날 수 없는 간극에 대한 내용이고요, 6부 대장정은 베트남에 의한 캄보디아 공산화에 반대하는 저항행진을 말하는데 프란츠가 이 대열에 참가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6부 대장정은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운동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배설물과 같은 혐오대상을 무조건 배제하는 키치와 공산주의 키치 그리고 자본주의 키치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에토스와 기존질서에의 숭배, 숭고함을 일거에 가치없게 만드는 위선과 비루함에 대한 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부는 토마시와 테레자가 시골에 가서 생활하는 것으로서 무거움과 가벼움의 화해가 성취되었을 때 토마시와 테레자는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인해 사망합니다.
3부의 이해받지 못한 말들과 6부의 대장정은 주로 사비나와 프란츠에 대한 이야기로 짜여 있는데 그 대주제는 키치입니다. 사비나는 체코라는 공산국가의 키치와 아버지의 극단적인 통제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는 삶에 태도를가지고 있었고 반면에 서유럽에서 자라나고 어머니와 같은 희생과 정조를 간직한 여인을 찾는 프란츠 사이에는 어떤 기표도 상호간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여자, 충실함과 배반, 빛과 어둠, 데모와 행진, 공동묘지에서의 산책, 진실속에 살기 등 어떤 기표들에 대해서도 서로 견해의 일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엘리트교육을 받은 프란츠에게 충실함은 긍정적 가치이고 배반은 부정적 가치인 반면에 공산주의 혹은 가부장적 전체주의 키치아래서 성장한 사비나에게 충실은 부정성이고 배반은 긍정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사비나에게 배반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줄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공산주의 키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즉 자본주의적 키치, 질서화된 체재의 상투적인 언어로부터의 탈주를 말합니다. 사비나는 키치를 위해, 상투적인 일상을 살기 위해 그런 무거운 짐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며 그녀는 오히려 동일한 것들의 반복인 일상을 벗어나서 미학적인 삶을 선택했으며 거기서 수반되는 고독, 외로움, 허무, 공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사비나의 입장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의 어깨위에 지워진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이 대목은 이소설의 제목이기도 하고 밀란쿤데라가 자신의 화신인 사비나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부분입니다. 화자는 사비나의 배반의 목표는 아마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소설의 제목이면서 밀란 쿤데라가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했던 가치였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밀란쿤데라는 자신이 화자이면서 작가인 동시에 자신의 도플갱어를 바로 사비나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토마시가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불빛에 놀란 커다란 나방이 전등깃에서 빠져나와 방 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우리는 전등의 주변을 날고 있는 불나방의 비상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비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날고 있는 나방은 죽음의 무게에 짓눌린 가벼움이 되고 들려오는 음악은 예술에 의해 고양된 무거움이 되며, 음악이 형식이라면 나방, 죽음은 내용이 됩니다. 나아가 예술과 자연은 인간 조건의 기쁨과 슬픔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실 토마시와 테레자의 죽음에대한 복선은 이 소설의 첫부분부터 깔려있습니다. 바로 소설 안나카레리나의 첫머리를 언급한 부분입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마주친 장소가 마침 직전에 누군가 기차에 치여 죽은 기차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설끝부분에서 안나가 기차에 치여죽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하여튼 궁극적으로 한 마리의 ‘순한 토끼’처럼 테레사의 품으로 돌아와 돈 주앙Don Juan이 아닌 트리스탄Tristan의 충실한 죽음을 죽는 토마시와 테레사의 전원 속에서의 목가적인 사랑과 행복은 비록 그것이 짧은 지속으로 끝나지만 영원으로 가는 한 순간을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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