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코동굴벽화 철학평전 / 에로스의 눈물/선사시대의 시스틴성당/인지혁명/죽음충동/프로이트/라깡/바타유/금기와 위반/에로티즘/카인과 아벨/불가능/실재/ 폭력/엑스터시/종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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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Oct 26, 2023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사랑입니다. 오늘은 프랑스 라스코 동굴안에 있는 여러점의 그림들중에 동굴에서 가장 들어가기에 어려운 아주 좁은 수직갱도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에 대해 철학적 비평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볼 그림은 일명 “가면쓴 셔먼과 들소” 인데요, 이 그림은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운 좁은 수직갱도 벽에 그려져 있습니다. 약 18,000년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이미 조르주 바타유가 1955년에 발표한 저서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과 1961년 발표된 그의 마지막 저서 에로스의 눈물에서 평전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바타유의 핵심개념인 에로티즘과 금기와 위반, 그리고 폭력과 성행위,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성적욕망, 잔혹성 그리고 종교적 신념 그리고 성과 죽음의 필연적 연결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스코동굴은 5개의 방과 4개의 좁고 긴 회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중심회랑은 선사시대의 시스틴성당“으로 불릴만큼 천장에 동물들이 화려하게 그려진 곳입니다. 그림들은 주로 들소, 야생마, 순록, 멧돼지, 아이벡스라고 불리는 산양 등 약 800여개의 동물형상과 2,000여 개의 기호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중에서 형상은 단 1개입니다. 이 그림들의 제작시기는 마들렌 중기, 즉 후기구석기시대 기원전 17,000년부터 18,000년사이로 추정됩니다. 이시기는 인류의 인지혁명이 시작된 후하고도 한참 지난 시대인데요, 그림을 묘사하자면 이렇습니다; 들소가 복부에 창에 찔려 내장이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들소는 고개를 돌려 자기의 상처난 곳을 바라보고 있고, 들소머리 쪽에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누워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에는 새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고 음경은 발기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왼쪽아래에 새가 꽂혀있는 솟대가 보입니다. 아마 주술사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창 하나가 누워있는 사람 손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사용했던 창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 의문에 싸입니다. 첫째, 이 사람의 얼굴은 왜 새 모양을 하고 있으며, 발기된 상태로 마치 죽은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지? 두번째 이들은 왜 바깥이 아니라 어둡고 좁은 미로같은 동굴로 들어가서 그림을 그렸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한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는 이 사람은 방금 사냥한 들소를 희생물로해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셔먼, 주술사라는 것이며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보편적 답은 고생인류들은 이미 사냥으로 생존해나가는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고 하나의 유한의 존재로서 대자연과 절대적 타자에 대한 피조물적 감정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일종의 주술성 혹은 religiosity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들은 노동하는 거주공간과 제의공간을 나누고 하지만 시기에는 변변한 건축술이나 지상에 성소를 설치할만한 능력이 없었던터라 동굴은 하늘과 땅, 지하세계가 하나로 소통된 ‘신성한’ 공간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동굴을 일종의 제의공간으로 삼은 것이라는 게 가장 설득력있는 견해입니다. 즉 동굴 바깥은 노동의 영역, 삶에 대한 의지를 펼치는 영역인 반면에 동굴안은 사유와 죽음충동의 영역, 죽음 너머를 표출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반이 반복되는 이유는 성적 방탕이나 폭력과 같은 위반행위에는 거부할 수 없는 매혹과 거부할 수밖에 없는 공포와 혐오가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끌어당김과 밀어냄을 바타유는 인력과 척력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그림에서도 인간이 창으로 들소를 찌르고 정작 인간 주술사는 죽음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행위의 절정을 이르렀을 때처럼 음경이 발기되었습니다. 폭력행사라는 거부할 수 없는 매혹 때문일까요, 아니면 거부했었어야 할 동물살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요? 내장이 쏟아질 정도의 고통을 성행위의 엑스터시 너머의 작음 죽음을 같은 것으로 간주해서 희생제물에 대한 연민을 느껴서일까요?
우리는 여기까지 고생인류로부터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공동체가 문명의 발전에 따라 공동체 유지를 위해, 즉 문명의 발전을 위해 근친상간과 공공장소에서의 성행위와 폭력사용, 그리고 시체, 배설물의 등 혐오적 사물들에의 접근을 금기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시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분명 어제까지 내가 알던 사람이 지금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데서 오는 이질감이 시체의 본질입니다. 이 이질감 때문에 시체를 두려워하고 피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혹은 다가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에의 접근을 금기로 설정하여 손닿지 않는 곳에 매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명형성과정에서 공동체가 만들어낸 금기는 위반행위를 전제로 규정되는 것이고, 위반은 또한 금기가 없다면 처음부터 일어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바타유는 고생인류로부터 금기시했던 죽음과 시체에 관련된 사유와 행동, 폭력, 성행위, 배설물취급 등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두려움과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 주술사의 음경이 발기된 것은 들소의 살해가 그에게는 성행위의 극단으로 가는 것과 같은 ecstasy, 즉 죽음으로까지 이를 수 있는 엑스터시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타유는 성행위의 절정에 이르는 것을 작은 죽음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타유는 노동에 관한 인식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에로티즘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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