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의 눈과 응시의 분열/왜상/대사들/한스홀바인/시관충동/원근법/응시길들이기/욕망주체/대상a/실재로의 귀환/뒤상/토러스/요구/도미니코피올라/루벤스/상징계/실재계/환상/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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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Sep 11, 2023

본영상은 지난번 강의내용인 라깡의 겹쳐진 삼각형이론을 이용하여 왜상과 정상을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눈과 응시라는 주제의 연장 강의로서 보는 것과 보여짐을 당하는 회화를 라캉의 관점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먼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을 다루고, 두 번째는 마르셀뒤상의 보여짐의 그림을 적나라하게 제작한 Étant donnés에탕도네와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 일화를 눈과 응시의 분열이란 관점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대사들)에서 그림 하단에 놓여있는 알 수 없는 얼룩같은 거무스름한 물체를 제외하고는 두 인물과 배치된 모든 정물들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고 하나하나가 어떤 확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물이 화가의 의도에 따라서 당시 신교와 구교, 삶과 죽음, 구원과 몰락, 국가 간의 힘의 관계, 과학과 종교, 등의 관계를 마치 함수관계로 표현하듯이 배치되고 조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원근법적 시점에서 즉 정면 조금 아래쪽에서 보면 얼룩을 제외하고는 모두 正像(바르게그려진 형상)입니다. 그에 비해 얼룩은 왜상(비스듬히, 삐딱하게 그린 형상)이 되겠죠. 歪像을 영어로 말하면 Anamorphosis입니다.
Marcel Duchamp의 Étant donnés, 일종의 설치미술인데요 여기보시면 회벽에 문을 달아놓고 문에는 안을 들여다볼수있게 두 개의 작은 구명이 있습니다, 왼쪽에 뒤상이 설치한 소품 배치방식을 보시죠. 이 스케치는 놀랍게도 유명한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Jean-François Llyotard가 그린 스케치랍니다. 그 다음 벽이 설치되고 그 벽은 마치 파열된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그 프레임안에 나뭇가지를 깔아놓고 그위에 풍만한 여성의 신체가 널브러져 있고 얼굴은 안보입니다. 여성신체는 흰 양피지위에 색을 칠해서 접어서 만든거고요. 관람자는 이 구멍으로 이 대형 설치물을 보는거죠. 이렇게 구멍으로 이런 광경즉 마치 살인범죄현장 같은 이 광경을 보는 사람은 어떤 심정이 들까요? 누가 자기를 보지는 않을까하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는게 당연하겠죠? 그는 보는 회화가 아니라 보임을 당하는 회화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즉 응시를 붙잡으려고 한거죠.
물론 뒤샹의 작품역시 우리가 언어체계에 포획된 자들이기 때문에 실재 그대로를 100%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보는 자가 대상a에 사로잡혀 말문막힘, 형용할 수 없는 상황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캔버스와 같이 유한하고 고정된 것를 부정하는 완벽한 반예술을 추구했고 그래서 그의 예술에 대한 신념을 나타낸 말이 더 인상적입니다.
“미래의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위한 유일한 길은 지하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만 그가 운이 좋다면 죽은 후에 인정받을지도 모른다.” 지하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징계 바깥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상품화된 예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Hal Foster가 말하는 실재로의 귀환을 꿈꾸는 작품이라할 수 있습니다. 즉 역사적, 원근법적, 과학적 지식을 근거로 만드는 인위적인 시각예술을 부정하는 것이죠. 그리고 관람자가 한 명의 예술가가 되어 작품을 비평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자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파라시우스의 베일은 파라시우스가 그림을 정교하게 잘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제욱스시의 보고자하는 욕망이 너무 커서, 즉 무의식적으로 응시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제욱시스는 새까지 속인 자신의 그림에 의기양양해졌고. 그래서 사실은 파라시우스의 그림은 보나마나 한 것이고, 그의 그림을 이미 본(déjà-vu;旣視)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요,. 제욱스는 욕망에 사로잡혀 서둘러서 파라시우스의 그림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일 뒤에 있는 당신이 그린 그림을 좀 보여주시오”라는 제욱스의 말은 바로 요구demand에 해당하고, 파라시우스가 그린 눈속임 베일은 재욱시스의 욕망을 불러일으킨 대상a입니다.
“베일 뒤에 있는 당신이 그린 그림을 좀 보여주시오”라는 제욱스의 말은 바로 요구demand에 해당하고(그림의 1번), 파라시우스가 그린 눈속임 베일은 재욱스의 욕망(그림의 2번)을 불러일으킨 대상a이며 이는 곧 얼룩이고 동시에 응시의 함정입니다.

사실 요구라는 것은 자신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제욱스는 이미 자신의 그림이 최고의 모방기술임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파라시우스의 그림을 볼 필요가 없었는데 부러움 혹은 질투, 시각적으로 말하면 사악한 눈(시선)evil eye에 사로잡힌 것이죠. 예를들어 젖을 뗀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젖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동생이 엄마의 젖가슴을 차지하자 이젠 필요하지도 않은 젖가슴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라캉은 이 아이의 시선을 evil eye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evil eye라는 말은 아주 사소한 질투인 것 같지만 어른이 되어서 더욱 강화되는데요. 우리의 일상속에서 발생하는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상호 시기, 상속받은 자와 상속받지 못한 자의 싸움, 자기에게 어떤 이익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타인을 괴롭혀서 정신적 학대에 의한 자살을 유도하기도 하고 세계역사에서도 대학살과 전쟁에까지 이르게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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