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양심의 부름에 귀 기울이기/존재와 시간/본래적실존/칸트/현사실성/실존성/처해있음/내던져져있음/빠져있음/존재론/결단/실존론적기투/현존재/염려/침묵/탓이있음/양심의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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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Feb 6, 2024

오늘은 하이데거 네 번째 시간인데요, 저번시간에도 언급했듯이 일상적인 평균의 감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인들이 본래적 실존으로 들어가기 위한 두가지 중요한 계기가 죽음으로 앞서달려감과 양심의 부름에 귀기울임 이 두가지라고 했는데요. 오늘은 양심의 부름에 귀기울임에 대해 하겠습니다. 하이데거의 양심해석은 존재와 시간 원서에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54절은 양심의 부름 자체가 본래적 실존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고요, 55절 양심의 존재론적 기초에서는 처해있음, 이해가능성, 말 세가지를 통해서 양심을 설명한 것이고요, 56절과 57절은 양심부름의 성격과 염려구성요소 또는 실존론적 구성요소를 교차 비교하면서 상세설명을 한 것이고요, 57절은 양심부름의 내용은 바로 자기가 본래적실존으로 살지 않았던 것에 대한 탓이 있음, 책임있음이라는 것이고, 59절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양심해석이 통상적인 양심해석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60절은 앞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 시간엔 저는 54절에서 57절까지를 양심의 부름의 작동방식으로 압축하고 그리고 58절 양심부름의 내용인 탓이 있음, 2 꼭지로 나누어 설명드리겠습니다.
하이데거에게 양심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규정되는 단순한 도덕적 원칙이 아니다. 양심은 세계내존재로서 살아가는 나를 이해하는 방식, 인간실존의 근본양식, 다시 말하면 도덕적 차원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론적 차원에 속한다. 양심은 우리가 소유해야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자체이고 한 인간의 존재 전체가 세워지는 토대라고 말한다.
양심은 부름이며 이 부름은 바로 이야기 형태로 발현됩니다. 여기서 이야기는 잡담이 이니라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소리는 침묵이라는 불안한 형태로만 부르기 때문입니다. 발성하면서 외치지 않는 이유는 양심의 부름은 세인자기를 시끄럽고 무의미한 일상세계로부터 끌어내서 존재가능이라는 고요한 세계로 돌려보내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세인들의 잡담을 침묵으로 묻어버리고, 본래의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시끄러운 외침은 적절치 않기 때문이라는 거죠. 요켠대 부름은 말의 한 양태이지만, 어떠한 발성도 필요치않는 무언, 혹은 침묵의 양태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 양심은 무엇을 위해 어디로 부르는가? 그것은 세인으로 살아가는, 세인들 속에 자신을 상실한 현존재를 불러내서 본래적인 자신의 고유한 자기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이 양심의 부름은 바로 이 부름을 듣는자 즉 비본래적 존재인 세인자기를 무의미속으로 몰아넣고, 세인자기를 본래의 자기자신에게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를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앞으로 불러내는 것Aufrufen,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불러내서 존재가능 앞에 세우는 것Vorrufen. 이런 양심의 불러냄Aufruf은 현존재로 하여금 그의 가장 고유한 자기존재가능으로 불러내는 것이기에 이 양심의 부름자체가 현존재를 부르면서 그로 하여금 양심을 이해하게 해준다.
양심의 부름은 나의 어떤 의지나 기획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기대나 의지에 반해서 그것이 부르는 것입니다. 평균적이고 일상성에 빠져있는 현존재가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언뜻언뜻 존재론적 물음에 걸릴 때마다 불안에 직면해서 으스스함, 혹은 섬뜩함한 근본기분에 사로잡힐 때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불현듯 튀어나오는 것이고, 자기자신을 존재가능 앞으로 불러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 즉 부름은 나에게로부터 나와서 나에게로 덮쳐온다고 말합니다. 현존재는 그때마다 밝혀진 무의미한 세계 속에 내던져져있음과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인해 섬뜩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양심이라는 부름을 발신하는 자는 세인-자기이긴 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불현듯 존재론적 불안을 직면해서 두려운 낯섬에 휩싸인 현존재, 내던져진 근원적 세계내존재입니다. 이 그림에서 이 경계영역에 있는 현존재입니다. 양심이라는 부름을 수신하는자, 즉 듣는 자는 우선 대개 일상성에, 맹목적 대세지향에 푹 빠져사는 세인-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이 두려운 낯섬에 휩싸인 현존재와 일상성에 푹 빠져사는 현존재 모두 세인자기라는 동일한 현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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