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우리 나중에 함께 살면 라일락 꽃을 심어놓자. [𝑷𝒍𝒂𝒚𝒍𝒊𝒔𝒕]
윤시월 윤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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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Jun 4, 2021

3.
나는 욕실로 들어와 욕조에 물을 받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온수에 온도를 맞추고 쓰다 남은 입욕제를 물에 넣었다. 나는 옷을 다 벗고 멍하니 욕조에 앉아있는다. 나는 종종 옳고 그름이 없는 문제에 대해 내 생각을 민수에게 강요했다. 논리적이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는 듯 했지만, 그 어떤 의미도 없었고, 그동안 억눌러왔던 가득 찬 화는 내 목소리를 통해 모조리 민수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내 생각을 무의미하게 민수에게 강요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한 말로 인해 민수가 속상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느끼고, 내가 왜 굳이 그녀를 다그쳤을까 하는 후회만 가득하다. 물론 민수가 10번 나를 혼낼 때 1번 다그치는 나였지만 나의 한 번의 다그침이 민수의 10번의 화보다 그녀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그녀에게 화를 내거나, 몰아붙이지 말자고 수 없이 다짐했지만 그게 맘처럼 되지 않았다. 다혈질인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화를 항상 참는 나지만 이럴 때만큼은 나도 역시 그의 아들인가 싶다. 물이 대충 다 받아질 때쯤 휴대전화를 스피커에 연결해 아무 노래나 틀고 욕실 밖에 휴대전화를 던져버렸다. 어제 자기 전에 분명 씻었지만 자는 동안 끈적한 기름을 누가 뿌린 기분이었다. 물속으로 숨을 참고 들어가자 깨끗한 물이 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물 안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노래가 멈췄다. 민수가 얼른 달려와 자기가 듣고 싶은 노래를 고르는 중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수가 좋아하는 음울하고 멜로디를 알 수 없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은 거의 모두 민수도 좋아한다. 내가 가끔 거친 락 음악을 가져와 이 노래가 왜 좋은지 설명하면 민수는 정말 신기한 사실을 들었다는 듯이 ‘오!’하며 노래를 자기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 그리곤 민수는 자주 내가 추천해 준 노래를 들었다. 반대로 민수는 가끔 이상한 멜로디의 노래를 들려주곤 했는데 나는 그 노래가 왜 좋은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노래가 좋은 이유를 신나서 설명하는 민수의 얼굴이 좋았다. 나는 (거짓말로) 너무 좋다며 플레이리스트에 음악을 추가하고 백번은 더 들을 것처럼 신나서 말하지만, 그 노래를 다시 들은 적은 드물다. 민수는 이 사실을 아는지는 모르겠다. 민수의 두 팔이 물속에 들어와 숨을 참고 누워있는 내 목을 조른다. 나는 거부감없이 목에 다정하게 감긴 민수의 마른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민수를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났다.

민수를 처음만난건 은경의 생일파티에서였다. 은경은 종종 자신의 친구를 다른 친구에게 소개해주며 같이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해 은경은 자신의 생일에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해 서로에게 소개해줬고 그중 한 명이 민수였다. 민수는 약속시각에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서 테이블을 세팅하던 나는 민수가 들어오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민수는 가벼운 맨투맨에 긴 치마를 입고 목발을 짚고 파티룸에 들어왔다. 나중에 다리는 어쩌다 다쳤나는 나의 질문에 볼링을 치다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상한 대답을 했지만 나는 의아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나중에 들었는데 볼링공을 던지다 손에서 공이 빠져나와 발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멍청이가 따로 없다.) 하얗고 맑은 피부에 키가 작은 여자애가 목발을 짚고 파티장에 들어오는 모습은 내 머릿속에 각인되기 충분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나는 민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냥 오늘 한번 보고 말 은경의 친구에 불과했다.

내가 민수에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은경이 민수를 소개할 때부터였다. 민수의 이름이 소개되자 누군가 실없이 ‘그러면 동생은 영희냐’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 순간 질렸다는 듯한 민수의 표정을 봤다. 물론 눈 깜짝할 사이에 그 표정은 민수의 어색한 웃음 사이로 사라졌다. 그 질문을 한순간부터 그 사람은 민수에게 따분하고 뻔한 사람이 된 것이다. 나만 찾은 민수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고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반응을 할지 고민하는 민수를 위해 나는 바로 민수의 다리가 왜 그런지 물어봤고 민수는 얼른 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뒤로 나와 민수를 제외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말하기보다 듣기가 더 좋은 나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고 민수 역시 낯을 많이 가리는 듯 리액션을 제외하고는 나서서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앉은 민수를 관찰했다. 먼 거리에 있던 음식이 먹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대화에 집중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부탁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봤다. 또, 와인을 먹다 조금 흘리자 혼자 화들짝 놀라며 휴지로 치마를 닦기도 했다.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굳이 할 일이 없을 때는 휴대전화를 눌러보기도 했다. 행동 하나하나를 놀리고 싶기도 하고, 알맞은 대화 주제를 찾아 민수의 어색함을 달래주고 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다리에 대한 질문 이후로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 전시회 보는 거 좋아하세요? “
” .....예? “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민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민수와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하던 대화에 열중해 있었고 그 순간부터 그 공간에는 우리 둘만 있는 듯했다. 뒤늦게 민수는 ‘아!’라는 한마디를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횡설수설 나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느니, 사실 저번 주에 전시회에 다녀왔는데 무슨 그림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느니 묻지도 않은 대답을 보여줬다. 나는 싱긋 웃으며 민수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 주말에 그림 보러 가실래요? “
” 네? 왜요? “
” 별 이유 없어요. 그냥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

민수는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도 민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민수를 빤히 바라봤고 민수는 싱긋 웃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아무도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했고, 파티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서로와 대화만 했다.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뻔하지도 않은 만남이었다. 우리는 그 이후로 반복되는 하루에 쉽게 질려 무모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버리고, 재미있는 일을 같이 찾아다녔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기 시작했다.

처음의 민수는 부서질 듯 작은 목소리를 갖고 나의 장난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했다. 하지만 지금의 민수는 나보다 더 강하고, 길을 걷다 내 엉덩이를 몰래 만져 나를 놀린다. 민수는 자주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마지막에는 올바른 답을 낼 줄 알았다. 나는 그런 민수가 좋았다. 잊어버리기 더 힘든 이름이지만 난 그 애의 이름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물속에서 참고 있던 숨이 터질 듯 막혀왔다. 더 이상은 숨을 참기 힘들어 물 밖으로 튀어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니 내 목을 조르던 민수는 없었다. 물속에서 1분도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어느새 불어버린 내 손바닥을 보며 나는 목욕을 마치기로 한다.

그 애의 이름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민수가 숨 쉬듯 베풀던 사랑을 나는 평생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00:00 Mingginyu 밍기뉴 - 라일락 꽃 : 첫 사랑, 젊은 날의 추억 (TAKE U Remix)
(https://soundcloud.com/maestro-oh/mig...)

03:23 AREN - for the lovers
(https://soundcloud.com/aren-park/for-...)

07:21 Mingginyu 밍기뉴 - Meaningless (Prod. Kyul)
(  / meaningless-prod-kyul  )

08:31 RIO - 일종의 고백 (원곡 : 이영훈)
(  / lemldqfmotlm  )

11:25 hongyeahjin(with 박현서) - 그대가 이렇게 내 맘에(원곡 : 이소라)
(  / with  )

16:03 조소정 - 여름날의 사랑

19:35 Jin Hwi PARK - 어른이 될게
(  / vpdjifsw7jm0  )

썸네일 : The scent of green papaya (1993) dir. by Trần Anh Hù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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