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고령 깃대만댕이(525m) 노고산(360m) 복호산(333m) (삼각점△223m/가야468) 예리산(361m) 덕은산(293m) 딧갓(137m)
유튜버박성원 유튜버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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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Apr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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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티고개~깃대만댕이~노고산~복호산~가륜리마을~삼각점(가야 468)~덕은산~예리산~딧갓~반성 1리 버스정류장(반암서원)

예리산은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예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93m이다. 이 산 정상에는 예리 산성이 있는데, 대가야시대 때 석축 산성이다. 대가야시대에 신라군이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예리 산성을 축조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는 설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예리 산성은 대가야시대에 축조되어 신라의 침입을 막는 산성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리 산성의 건립 연대는 문헌 자료가 전하지 않고 발굴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다만 예리 산성 내외에서 대가야시대의 토기 편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근의 대가야시대의 예리 고분군과 능선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대가야시대의 산성임이 분명하다. 예리 산성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고령군 덕곡면 예동 뒷산에는 쌓다가 그만둔 산성이 있다. 삼국통일을 염원한 신라와 백제 사이에 있는 6가야는 늘 목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마침내 신라의 진흥왕은 대가야 고령을 제외한 5가야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대가야는 항복하지 않았기에 늘 대가야 정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흥왕은 이사부 장군을 대장으로 삼고 화랑 사다함을 부장으로 하여 마침내 대가야 정벌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대가야 사람들은 덕곡면 예동 뒷산에 산성을 구축키로 하고 산성을 쌓았는데, 산의 경사가 너무 심하여 산성 구축이 매우 어려웠다. 그때 염력을 쓰는 도인(道人)이 찾아와 자기가 산성을 구축하겠다고 하니 대가야에서는 그 사람에게 산성을 쌓게 하였다. 그런데 신라의 염탐 군이 이 사실을 알고 신라 군사에게 아뢰니 매월이라는 젊은 여자를 보내어 도인을 미인계로 유혹하였다. 미인의 유혹으로 이 도인은 술에 태운 독약을 먹고 죽어버리고 대가야는 망하고 말았다.” 이 예리 산성 설화는 대가야가 신라에 끝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는 고령의 지역적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설화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예리 산성이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축조된 산성이라는 점을 잘 시사해 주고 있다. 현재의 성벽은 조선시대인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들이 축조한 것으로 전한다.

산성은 대가야읍과 덕곡면 소재지인 예리 마을에 있다. 예리 산성은 예리 마을의 북쪽에서 동서로 길게 뻗은 높이 360m의 야산 정상부에 있다. 현재 산 정상부에는 산불 감시 초소와 민묘 등이 들어서 있다. 고령군 덕곡면에 소재하지만 성주군 수륜면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예리 산성의 형태는 정상부를 중심으로 동쪽 능선으로 일부 내려오고 동북 방향으로 길게 뻗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다. 산의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산성인데, 둘레는 800m 정도이다. 정상부의 서쪽에 문지가 남아 있고, 남쪽은 자연 경사면에 석벽을 쌓았으며, 북서쪽은 석축과 자연 경사면을 혼용하였고, 동북쪽은 계곡 능선을 따라 토석 혼축을 하였다. 예리 산성의 성벽은 유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대부분의 구간에서 석축으로 조성된 편축 성벽이 확인된다. 이 성벽은 장방형의 돌을 횡으로 일부 쌓고 그 사이사이에 막돌을 채워 넣었다. 유존 상태가 양호한 동쪽 석벽은 현재 14~16단 정도 남아 있고, 높이는 3m 정도이다. 하지만 흘러내린 돌을 고려하면 성벽은 최소한 4m 이상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가야 시대의 토기 편과 고려 시대, 조선시대의 기와 편들이 많이 산포하고 있다. 특히 동쪽 계곡부 일대에서 다량의 기와 편과 토기 편들이 노출되어 있다. 이곳에서 채집된 유물은 지산동 45호분 단계로 추정된다고 한다.

예리 산성은 성 내부에서 채집되는 유물로 보아 축조 시기는 5세기 말 전후로 추정된다. 예리 산성은 노고 산성과 운라 산성 중간 지점에 있다. 따라서 이 산성은 성주 방면의 대가천 유역을 방어하는 가야산~노고산성~예리산성~운라산성~본관리산성~본관리 옥산성~고령 주산성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을 담당했던 산성 중의 하나였고, 대가야 멸망 이후에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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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박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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