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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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Feb 19, 2024

망했다는 생각이 들면 난 이미 진 것 2023.03.01

생각이란 참으로 대단하다.
최악이었던 순간에도 무언가를 끄집어내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고,
완벽했던 경험을, 하루를, 순간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
평가는 주관적이기에 누군가에게 성취로 보일 수 있는 무언가도 내가 망쳤다고 느끼면 그저 망한 작품에 그친다.
요즘의 나는 나 자신에게 이미 수백 번 지고 있는 걸까.

나의 무너짐과 넘어짐은 익숙하다.
20대 이후 줄곧 안고 온 이런 감정들에 어디 명확한 해결책이 있었나.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꽁꽁 묶어둔 나와의 괴리 속에서 좌절하는 건 너무 흔한 일이다.
철없던 시절엔 그걸 숨기지 못해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잠깐이나마 기대도 보고,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에게 위로를 받아 인연이 되고,
아주 잠깐은 어리광도 부릴 뻔했지만 다 관뒀다.
자물쇠를 걸어 글을 수백 개 적고, 수백만 원을 투자해 상담을 받고,
그렇게 미치지도 않을 안간힘을 쓰다가 포기하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호전되는 기분이 들었거든.

사실 한동안은 너무 많이 울어서 걱정이었다.
나는 울음을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인데 그냥 정말 사소한 것에 툭.
사고 싶었던 게 품절되거나, 찾으려던 사진이 안 보이는 그런 정말 있을 수 있고 사소한 순간의 일에도 나는 과하게 반응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돌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아주 작은 흐트러짐 하나가 나를 저 바닥으로 몰았다.
나의 바보 같은 말 한마디에도 복기하며 펑펑 울 수 있는 그런 미친 사람이었지 내가.
저 먼 뉴욕에서,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나는 땅으로 꺼졌다.
수천 번 가라앉았던 나의 올림픽체육관도.
사람들은 내가 렉사프로와 수면제 없이는 버텨낼 수 없을 만큼의 나약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까.

그런데 이제는 반대야. 다시 감정이 고장 났다.
이전과 같은 감정이 몰려와도 이제는 마냥 울 수 없는 사람이 됐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어떻게든 모든 걸 막아버려 결국 아무 감정도 내비칠 수 없던 상태, 제일 바닥이었던 그대로.
나 잘 하고 있는데. 나 이렇게 웃고, 운동도 하고, 일도 하고, 잠도 잘 자고 있는데 왜?

책을 읽어도 감정이 끼어든다. 앞으로 할 일을 상상하고 더욱더 열심히 살아도 결과는 똑같다.
모든 게 하고 싶지 않아져. 그런데 해야 겨우 견딘다. 그래서 나를 더 굴린다.
토할 것 같이 단 걸 밀어 넣고 플레이리스트엔 넘기고 넘겨도 신나는 노래가 나오지만 난 그대로다.
적어도 나의 이 모습을 인정할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더 이상 가라앉고 싶지가 않다.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지도 않다 이건 누구도 도울 수 없으니까.

떠나면 나아질까 다 관두면 나아질까 혹은 그냥 부딪혀 가라앉을까?
쪽팔리고 두렵다 지금 나의 이런 모습도.
근데 모든 게 너무 무기력해 나도 이런 내가 정말로 싫어.

스물네 살에도 내가 이렇게 나한테 지고 있을 줄 몰랐다.
지금은 남에게 기댈 때가 아닌데 멍청하게 또 요행을 피우려 했다.
그 결괏값이 이건가?
나의 저주는 풀릴 생각을 안 하네.
올해는 딱 이만큼만 최악이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의 바닥은 없게.
그렇게 지나가고 싶다 모두가 지나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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