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검무 - 중요무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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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Jul 1, 2017

2017.7.1土 촉석루각에서 (폰카)

문화재 소개(출처 : 진주시청)
우리나라 검무는 신라시대(新羅時代) 관창(官昌)의 칼춤이 효시임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보인다. 그런데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관창의 모습을 가면으로 대신했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여아의 관창무가 기록되어 있으니 용감한 동자무였던 칼춤이 우아한 여아무로 변천한 듯하다. 신라(新羅) 이후 오래 전승되면서 궁중과 관아에 예속되었던 관기에 의해 전래되거나 인멸되고 전국의 권번(券番)에서 명맥을 잇게 되었던 것이다.

경남(慶南)에서는 진주(晋州)를 비롯하여 통영(統營), 동래(東萊) 등지에서 전수하고 있었으나 권번의 폐지와 함께 사라졌던 것을 진주에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진주검무의 본질과 특징
궁중정재의 검무가 각처의 교방으로 내려가면서 진주지방에 정착되면서 전승된 춤이 진주검무이다. 조선말 진주교방의 여기(女妓)였던 최순이가 9세 때부터 검무를 전수받았고, 그 후 궁중에 들어가 어전에서 연희하다가 진주에 낙향해 동기들을 가르치면서 검무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다. 따라서 진주검무는 궁중검무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무용사적 의의가 크다.

이러한 까닭으로 진주검무는 우리의 전통춤 가운데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진주검무는 연출형식이나, 춤사위, 농검(弄劍) 등의 면에서 상당히 수준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무형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진주검무는 다른 지역 검무처럼 여러 무희들이 전복과 전립을 착용하고 무구(舞具)로는 칼을 이용하는 군무(群舞)에 해당된다. 진주 관아에서는 예로부터 연향에 무희들이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것은 진주 감영 교방청 기생으로 있던 최순이(1892년생)가 1900년대 초에 궁중의 진연도감청에 소집되어 궁중검무를 학습하고 고종 황제 앞에서 연행한 뒤 진주로 내려와 전습시킨 것이라 한다.

진주검무는 8명의 무희가 전복을 입고 남색 전대를 매고 전립을 쓰고 손에 색동 한삼을 낀 복식이다. 도드리 장단에 늘어서서 느릿하고 장중하게 한삼을 뿌리며 춤을 추다가 한삼을 빼어 놓고 맨손으로 입춤사위로 추다가 이어 엎드려 숙인사위로 어르며 앉은사위로 춤을 추다가 땅에 놓았던 칼을 양손에 갈라쥐고 씩씩한 타령 장단에 칼을 좌우 옆사위로 휘두르며 장쾌하게 칼춤을 춘다. 이러한 춤의 진행을 지닌 진주검무는 다른 고장의 검무에 보이지 않는 여러 화사한 춤사위가 보인다. 그리고 근래에까지 검무는 굽은 칼을 썼으나 최근 보유자들은 옛날 방식대로 곧은 칼을 쓰고 있다. 특히 진주검무는 춤의 전반부에 한삼을 끼고 추는 것이 다른 지역과 색다른 점이며, 춤사위는 활달한 기상이 돋보이며 손놀림이 특이하다.

타지역의 검무들과 진주검무를 비교한 결과 진주검무만이 지닌 특징을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궁중에서 연희하던 검무의 원형을 완전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칼춤 형태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둘째, 오랜 역사와 전통성을 지니고 있어 예술적인 가치가 풍부하며 무용사적인 면에서도 근거가 명확하다.
셋째, 춤사위가 다양하고 칼 쓰는 법이 독특하며 처음에 색한삼을 양손에 끼고 추는 것이 특징이다.
넷째, 진주검무가 보유한 춤의 순수성은 진주 교방의 전통을 이은 진주권번 출신의 노기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이 춤을 전승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섯째 , 진주검무가 궁중검무에서 나온 만큼 정재요소가 강해 정재무의 기본 형식을 갖추고 전승한다는 점에서 다른 민속무와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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