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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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Jul 4, 2024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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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7월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요청으로
양화진 언덕 일대를
외국인 매장지로 획정하였다.

이곳에
처음으로 매장된 사람은
미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885년 6월에 내한하여
왕립병원인 제중원 원장으로
의료 활동을 하다가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에 사망한
헤론(John W. Heron, 惠論)이었다.

주한 외국인들은
외국인묘지협회를 조직하고,
외인묘지규칙을 제정하여 운영하였다.

1893년 10월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5개국 공사들이 조선 정부에
“양화진외인장지” 주위에
담장을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1896년 12월
러시아공사 웨베르(K. I. Waeber)는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공문을 보내
묘지기가 주변에 산 땅의
소유권 인정을 요청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1946년 10월 1일자로 다시
구미인묘지회 소유로 등기가 변경되었다.

1961년
외국인토지법 제정으로
외국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었으나,

1978년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이 묘역이 문제가 될 때까지
‘경성구미인묘지회’ 대표
언더우드 3세 명의로 남아 있었다.

1979년
지하철 2호선 공사로
서울시에서
이 묘지를 이전하려 하였으나
기독교계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985년 6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묘지소유권을
경성구미인묘지회로부터 인수하고
묘지 경내에
한국기독교100주년선교기념관을 건축하였고
이 묘역의 명칭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변경하였다.

2006년 5월
100주년기념교회는 이 묘역의 공식 명칭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 및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이 묘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초기에 황폐하였던 묘지는
주한(駐韓) 외국인들의 모금운동으로
새롭게 가꾸어졌지만,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외면 당하였으며,
6 ·25전쟁 때에는
이 부근이 격전지로 변하는 바람에
묘지석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 있고,
일부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현재
총 415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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